반예술의 폭풍 - 다다이즘
Marcel Duchamp (1887~1968)
초기
물려받은 예술적 전통이 있어 뒤샹 집안의 여섯 자녀 중 4명이 미술가가 되었다.
1875년에 태어난 가스통은 나중에 자크 비용으로 알려졌으며,
1876년에 태어난 레이몽은 스스로를 뒤샹 비용이라고 불렀다.
남자형제 중 막내인 마르셀과 1889년에 태어난 누이동생 쉬잔은
미술가로서 뒤샹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다.
그는 고향에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마르셀 르프랑수아의 초상 Portrait of Marcel Lefrançois〉은
그가 이미 일정한 양식과 기법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뒤 몇 해 동안 뒤샹은 만화잡지에 풍자만화를 그리면서 당대의 주요한 회화경향(후기 인상주의 및 폴 세잔의 영향,
야수파, 입체파)을 빠르게 경험했고 여러 양식을 두루 실험하기는 했으나 특정한 양식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는 모방을 꺼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을 만들거나 전시회를 자주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평범한 예술가는 아니었다. 야수파 운동이 사라진 지 3~4년 뒤에 그는 야수파 양식의 작품을 그렸는데,
이것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들이다.
〈미술가의 아버지의 초상 Portrait of the Artist's Father〉은 그 두드러진 예이다.
1911년이 되어서야 그는 입체파의 영향을 보여주는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무렵 그는 입체파와 전위적인 모든 것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귀었다.
그의 또다른 절친한 친구로는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있는데, 그는 완전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1909년까지 가장 정통적인 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던 화가였다.
뒤샹과 그는 둘 다 입체파가 너무 체계적이고 정적이며 '지겹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둘 다 '반(半)사실주의'에서 시작하여 움직임을 '비대상적'으로 표현하는 양식으로 곧장 나아갔고,
그 가운데서 예전에 그 명칭만 알고 있었던 '미래주의'와 '추상주의'를 경험했다.
이렇게 몸이 움직이는 연속적인 단계를 병렬적으로 배치한 것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의 착상을 엿볼 수 있다.
두 작품의 주된 차이점은 〈초상〉에서 캥거루 같은 실루엣이 눈에 띄는 반면, 〈누드〉에서는 누드의 모습이 전혀 없고
다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기계의 모습이 보일 뿐으로, 이를 통해 회화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비대상적이고
거의 영화와 같은 효과를 얻고 있다.
그에 대해서도 알고 있던 이 위원회의 위원들도 보수주의자들은 아니었으나 혁신적인 시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1년 뒤 뉴욕 시에서 열린 ' 아모리 쇼'에서 이 작품은 대중들에게 충격을 준 수백 점의 작품들 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이 작품이 파리에서는 악평을 듣고 뉴욕에서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여기에 자극을 받아
뒤샹은 25세에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었다. 뒤샹이 그의 작품에서 어느 누구도 참을 수 없는,
거의 그림 자체를 비웃는 듯한 아이러니를 나타냄으로써 그림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도 허물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제목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장난투였다. 입체파조차 사람들의 눈을 즐겁
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뒤샹의 유일한 모티프는 도발성이었던 것 같다.
〈처녀에서 기혼녀로의 변화 Le Passage de la Vierge à la Mariée〉와 〈기혼녀 Mariée〉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이것들은 입체주의나 미래주의 또는 추상주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인체에 대한 뒤샹의 독특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세계 안에서 미적 가치를, 이른바 상식 세계에 맞서는 공격적인 지성으로 바꾸려
했다. 일찍이 1913년에 그는 매우 난해한 작품인 〈거대한 유리, 또는 독신남자들이 발가벗긴 신부, 그 조차도 The Large
Glass, or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를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하여 망막미술을
완전히 거부하고 산업 디자인의 기하학적 방식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상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남자와 여자 및 사랑에 대
한 그의 생각을 나타낸 기계의 청사진 같았다. 〈누드〉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유리〉도 현대 회화 작품들 가운데서 매우
특이한 것이다. 1913~23년에 뒤샹은 거의 그림을 위한 예비 연구와 습작에만 전념했다.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기는
했으나 결코 작품 활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는 단지 평범한 자전거 바퀴에 지나지 않는 〈자전거 바퀴 Bicycle Wheel〉를 제작했다. 1914년에 만든 〈약국 Pharmacy〉
은 겨울 풍경이 담긴 상업 인쇄물에다 약제사의 병을 생각나게 하는 2개의 작은 형상을 덧붙인 것이다. 이러한 레디메이드
가 미술 작품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데 대해 비웃는 태도 이상의 것으로 여겨지고 긍정적인 가치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나서였다. 레디메이드를 계기로 현대 미술은 본질적으로 창작과 비평의 혼합물이 되었다.
미국으로 가서 '아모리 쇼'를 통해 친구들을 사귀었다. 1915년 6월, 그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은 그를 유명인사로서
환영했다. 지식인 단체들에서의 따뜻한 환영도 그의 기분을 고무시켰다. 부유한 시인이자 수집가인 월터 아렌스버그는
그를 위하여 자신의 집에 작업실을 차려주었으며, 그는 거기에서 곧 〈거대한 유리〉의 제작에 착수했다. 그는 아렌스버그
그룹의 중심인물이 되어 명성을 떨쳤으며, 〈누드〉를 그린 화가인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싶어하는 미술관들로부터 많은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전업화가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제의들을 모두 거절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프랑스어 강습을 했다. 그는 그무렵 작품을 팔면 인기를 끌었을 것이지만 친구들에게 그것들을 무료로 나누어 주거나 일부
러 적은 금액을 받고 파는 데 만족했으며, 그후에도 계속 그러한 미술가로 남았다. 그는 아렌스버그를 도와 〈누드〉를 비
롯한 그의 작품의 상당수를 보이는 대로 사들였다. 이것들이 아렌스버그 컬렉션의 주요작품이 되었으며, 뒤에는 필라델피
아 미술관으로 넘어갔다.
그는 1917년에 독립미술가협회의 제1회 전시회에 〈샘 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인 소변기를 출품했다. 그는 이 단체의
창립회원이었지만, 그 작품에 'R. Mutt'(얼간이)라고 서명했기 때문에 그것은 거절당했다. 그의 레디메이드는 피카비아가
잡지 〈291〉(1917)에서 뉴욕 시에 소개한 다다이즘 운동을 몇 년 앞질러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에 대한 반응으로서
뒤샹은 아렌스버그와 H. P. 로셰를 도와 〈맹인 The Blind Man〉과 〈롱롱 Rongwrong〉을 발행했는데, 전자는 단 2회만
발행되었고 후자는 단 1회만 발행되었다. 그뒤 1921년에 화가인 맨 레이와 함께 〈뉴욕 다다 New York Dada〉를 단 1회
발행했다.
림을 팔아 나온 돈으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9개월 동안 지냈으며, 그곳에서 정전(停戰) 및 그의 형 레이몽 뒤샹 비용
과 기욤 아폴리네르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1919년 그는 피카비아와 함께 파리에 머물면서 최초의 다다이스트들과
교류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가장 유명한 레디메이드인, 콧수염과 염소수염을 붙인 〈모나리자 Mona Lisa〉라는 사진작품
이 나왔다. 이러한 행위는 과거의 미술에 대한 다다이스트들의 경멸을 나타낸 것이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의 미술은
이제 막 끝난 전쟁의 공포를 일으킨 파렴치한 문명의 일부였다.
예술활동도 점점 더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영화는 움직임에 대한 그의 흥미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때까지 그가 만든
것들은 다만 잠재적인 기계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 작동하고 움직이는 실제 기계를 만들게 된 것이다. 최초의 기계는 광
학에 관한 것이었으며, 여기에서 단편영화인 〈무기력한 영화 Anemic Cinema〉(1926)가 나왔다. 또한 "광학적 축음기
음반"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을 만들면서 그는 일종의 아마추어 기술자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보잘 것 없는 기계
들은 산업의 야망을 비웃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는 나머지 시간에는 체스 놀이에 열중하여 국제시합에 참가하기도
하고 1932년에는 그 주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를 유지했다. 1934년 그가 〈거대한 유리〉에 관한 일련의 자료들을 담은 〈초록 상자 Green Box〉를 출판하자 초현실주의
시인인 앙드레 브르통은 이 그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처음으로 뒤샹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논문을 써서 1935년 파리의
〈미노토르 Minotaure〉지에 실었다. 그후 초현실주의자들과 뒤샹의 관계는 더 가까워졌으며, 뒤샹은 브르통을 도와
1938~59년에 초현실주의자들의 모든 작품전시회를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그는 그의 작품들을
복제한 68점의 축소품들이 들어 있는 〈부아탕발리즈 Boîte-en-valise〉라는 화첩을 만들었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
하자 그는 여러 차례 여행을 하며 그의 작품을 국외로 몰래 옮겼다. 결국 그것은 뉴욕 시로 옮겨졌으며, 그는 거기에서 브르
통과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등 망명 중인 많은 초현실주의자들과 합류했다. 그는 1942년 10월과 11월에 뉴욕 시에서 열
린 초현실주의자들의 전시회를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서 〈거대한 유리〉를 전시하여 명성을 회복했으며, 1945년에는 미술잡지인 〈전망 View〉의 특별호에 그가 특집으로 다루
어졌다. 2년 뒤 그는 초현실주의 전시회 문제로 브르통을 도우러 파리에 갔으나 곧 뉴욕 시로 돌아와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1954년 티니 새틀러와 결혼한 뒤로는 예전보다도 더욱 은둔해서 살았으며,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기묘하고 독특한
물건을 만들고 체스를 두며 살았다.
부분을 뒤샹이 이미 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세계 곳곳으로부터 그에게 찬사가 쏟아졌고 그의 작품 회고전들이 미
국과 유럽 각지에서 열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레디메이드들이 그의 허락하에 제한된 수로 복제된 것이며, 가장 놀랄
만한 일은 그가 뇌이에서 죽은 뒤 그의 친구들이 그가 마지막 20년 동안 남몰래 〈명제:1. 폭포, 2. 조명 가스 Etant
donnés : 1. la chute d'eau, 2. le gaz d'éclairage〉라는 걸작을 만들었다는 것을 듣게 된 것이다. 그것은 현
재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있는데, 무거운 나무문에 2개의 작은 구멍이 나 있어 그것을 통해 뒤샹의 신비한 예술세계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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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세개의 표준정지장치> 1913-4] 다다이스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뒤샹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뒤샹은 1미터 길이의 실 세가닥을 각각 1미터 높이에서 떨어뜨렸습니다. 땅에 떨어진 실은 각각 우연하고 불규칙한 형태를 하고 있었겠죠. 뒤샹은 이 형태를 그대로 고정시켜서 일종의 자(measure)를 만들었습니다. 위의 사진을 봅시다. 세가닥의 실의 모양을 본뜬 그림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형태를 따라 만든 나무로된 자가 있습니다. 이것들을 뒤샹은 <세개의 표준 정지장치>라고 명명하고 자신만의 측정법으로 삼았습니다. 말하자면, 어차피 우리가 쓰는 미터법도 인위적인 약속일 뿐인데, 미터법을 마치 절대적인 척도인양 신봉하는 관습이 우습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뒤샹은 <세개의 표준정지장치>를 이용하여 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세개의 자를 각각 세번씩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철도 지도같은 이 그림은 사실상 전적으로 뒤샹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이 그림이 만들어진 과정을 생각해 봅시다. 표준정지장치라는 자의 형태는 어디까지나 아주 우연히 얻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 이 표준정지장치의 회로도 뒤샹의 의도뿐 아니라 우연한 힘에도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사실 미술작품이라는 것은 작가의 창조적 능력의 구현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선 뒤샹 자신이 결정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부분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습니다. 즉, 뒤샹은 자신의 작업에 우연 혹은 자연력을 개입시킴으로써 예술가의 독창성이라는 신화에 일격을 가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작가가 직접 만들지 않은 기성품을 작품으로 제시한 것을 우리는 레디메이드(readymade)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미술작품이라고 부를 때는 그것이 예술가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 유일무이한 물건임을 말합니다. 예술가는 마치 신처럼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구요. 그런데 <샘>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독특한 물건도 아니고, 이 작품에선 예술가의 독창성이 발휘되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 변기를 만드는 회사에선 하루에도 수천개의 변기를 만들어 낼 터이고, 뒤샹은 단지 그 중 하나를 구입해서 전시했을 뿐이죠. 전시회에서 받아들여 주질 않았죠. 우선 작가가 창조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소변기라는 대상의 성격이 전시관계자들의 심기를 더욱 건드렸겠죠. 하지만 수십년이 지나고 나서 이 작품은 하나의 신화가 되었고, 미술애호가들에 의해 수집되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첫째, 뒤샹이 이 물건을 선택하여 미술작품으로 결정하고 여기에 서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미술가는 작품을 창조하는 대신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예술작품으로 그가 이것을 스스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여느 미술가들처럼 그는 서명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름 대신 R. Mutt라는 이름을 써 넣었죠. 도대체 Mutt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실존인물의 이름도 아니고, 뒤샹의 가명도 아닙니다. 그냥 허구의 이름일 뿐인데, 사실 영어에서 mutt란 잡종개, 바보라는 의미를 지닌 명사입니다. 두번째로, 이 변기가 작품이 될 수 있는 요건은 이것이 미술관 혹은 그에 준하는 어떤 장소에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이 변기가 어느 화장실에 설치되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성들의 배설욕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가 되겠지요. 하지만 <샘>이라고 명명된 이 변기는 그런 기능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사물이 놓여 있는 위치가 그 사물의 원래 기능을 전도시킨 겁니다.
뒤샹의 최초의 레디메이드라고 알려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요?
자전거 바퀴와 의자를 연결해 놓았군요. 아주 엉뚱한 결합입니다. 다다이스트들은 이렇게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사물들을 엉뚱하게 결합시키는 일을 아주 즐겼습니다. 이 작품은 문득 "파란 장미"와 같은 불가능한 문구를 연상시킵니다. 세상에 파란 장미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린 "파랗다"라는 형용사와 "장미"라는 명사를 결합시켜 하나의 문구를 만들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전거와 의자는 서로 아무런 상관도 필요도 없는 물건들이지만 이렇게 이질적인 사물들을 결합시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 겁니다. 이런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일상적인 사물에 대한 전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지요.
자전거 바퀴(1913) ] 그는 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언급을 하기 전에 이 자전거 바퀴를 뱅글 뱅글 돌리면 무척 재미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작품에 대한 작가의 선택과 아이디어 자체가 예술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지요. 그런데 좀 이상하다구요? 네, 콧수염이 있는 모나리자네요. 그러고 보니, 전혀 모나리자처럼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모나리자는 신비스러운 매력을 풍기는 여인인데, 이 그림 속의 인물은 수염이 난 남자입니다. 뒤샹은 모나리자를 복사한 그림위에 수염을 그려 넣는 장난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밑에다 이 알파벳 문자열을 불어로 읽으면, "엘르(L) 아쉬(H) 오(O) 오(O) 뀌(Q)"가 되는데, 이것을 연음시켜 "엘라쇼오뀌"라고 읽으면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Elle a chaud au cul)"라는 문장과 같은 발음이 됩니다. 동음이의를 이용한 말장난(pun)을 하고 있는 거지요. 모나리자의 신비스런 미소는 사람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런 상상의 여지를 풍부하게 하고 있는 것이 레오나르도의 천재성이기도 하고요. 여하튼 이 문제의 미소때문에 사람들은 갖가지 말들을 지어내곤 했었습니다. "그녀가 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지 알아? '난 사실 남자란 말이야. 레오나르도는 사실 호모였거든..'하면서 우릴 비웃고 있는거야...." 과연 뒤샹이 그녀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넣으니, 모나리자는 정말로 남자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예술의 전통을 모독하는 행위로 읽혀질 수 있습니다. <모나리자>하면 우리가 명화의 대명사처럼 여기는 작품인데, 소위 명화의 권위와 그러한 권위를 부여하는 전통에 대한 조소어린 장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뒤샹은 20세기 미술의 역사에서 피카소에 비견될만한 영향력을 행사한 미술가입니다. 뒤샹은 그의 다양한 예술 활동을 통하여 미술의 정의와 미술가의 독창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 노골적인 도전을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미술은 다다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표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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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 (1912)]
입체파 전시회에 이 작품이 전시되자 전시주최자들은 비상 회의를 소집하였답니다.
운동감이 살아있는 이 작품을 입체파로 해석하기 힘들다는 것이었죠.
미래주의 스타일에 가깝다는 평을 받았던 이 작품은 결국 전시회장에서 내려오게 되었지만
뉴욕에서는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입체주의자들은 물체를 분해하여 표현하였으나 뒤샹은 시간의 흐름을 분해하여 화면에 잡아놓은 것입니다.
병걸이 (1914)]
뒤샹의 작품 많은 수가 소실되고 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재창조가 된 것입니다.
위의 작품도 뒤샹의 전시를 보고 다른 사람이 재현된 것이죠.
뒤샹은 가급적이면 예술가의 행위가 개입되지 않은 순전한 선택으로만 예술이 되는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은밀한 소음과 함께 (1916)]
노끈으로 만든 구형을 나사로 조여진 두 장의 동판 사이에 넣고,
가운데 구형 속에는 무언가 작은 물체가 들어가 나사를 조이면 소리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노끈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소리에 대해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 (1917)]
광고간판을 이용한 레디메이드 작품으로 "에나멜이 칠해진 아폴리네르(Apolinere Enameled)" 라고 광고 문안의 몇 글자만을 고치고,
오른쪽 거울에 비친 소녀의 머리카락을 그려넣은 것입니다.
작가의 창조적 행위와 의미부여를 통해 단순한 상업간판이 예술작품으로 재창조된 것이죠.
김춘수님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라는 시가 떠오르네요.
위대한 유리 (1915-23)]
"총각들에 의해서 발가벗겨지는 신부 조차도" 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뒤샹은 이 작품을 거의 10년 동안 제작했습니다. 그래서 유리에 나타난 색상도 아주 독특하게 되었구요.
전시회를 끝내고 이 작품이 구매자에게 이동하는 동안 운반자의 실수로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깨어진 작품을 다른 유리로 덧대게 되었는 데, 덕분에 오히려 더 독특한 작품이 되었답니다.
뒤샹에 의해 발급된 사채 (1924)]
당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유산으로 인해 도박을 시작했던 뒤샹은 결국 가진 돈을 룰렛으로 인해 다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에 비누칠을 하여 두개의 뿔모양을 만들어 목신처럼 보이게 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게 하여 멋진 '사채'를 발행하였습니다.
로즈 셀라비라는 이름으로 서명한 이 사채는 지금은 꽤 값이 나간답니다.
자화상 (1958)]
그의 나이 71세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자신을 되돌아 보았을 때 막연한 상실감과 아쉬움으로 인해 그림자로 자신을 표현한 듯합니다.
창 밖에서 고개 숙인 그의 모습에서 쓸쓸한 황혼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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